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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북중미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 축구 망했다는 얘기만 온 세상에 가득 차있는 듯하다. 손흥민도 있고, 이강인도 있고, 김민재도 있는데 답을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되나 싶어 답답한 마음에 제목부터 시원한 책이라도 들춰본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책은 내가 아니라 월드컵을 준비하던 홍명보 씨가 읽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심지어 적힌 내용까지 홍명보 씨가 월드컵 가기 전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내용이라 대한민국 축구의 현 상황이 더욱 답답해졌다.

패자에게 건네는 개평 따위, 나는 받을 생각이 없다
20대 초반의 나는 강한 상대를 보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지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안정환이라는 그 비현실적으로 높은 벽을 보면서도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다고 여기고, 적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에 화내고 자책하고 최소한 울기라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태도로 축구를 하고 있다.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마음, 그것이 프로로 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첫 번째 마음가짐이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열 번 겨뤄서 열 번 다 지더라도 여전히 지는 것을 싫어해야 한다. 승자에게 손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쳐주면서도 속으로는 울면서 칼을 갈고 있어야 한다.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내가 보기에 많은 이들이 충분할 만큼 싫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져놓고선 곧잘 정신 승리를 택해버린다. 졌지만 잘 싸웠다고, 그래도 우리는 상대와 달리 떳떳하다고, 그래도 나는 좋은 축구를 했다고, 나는 상대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애써가며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에게는 만에 하나 있을 기회도 오지 않으니까. 정신 승리는 그날 내가 받은 MVP 트로피 같은 것이다. 패자에게 건네는 개평 따위, 나는 받을 생각이 없다.
💡 밑줄 코멘트
'안 진다는 마인드'가 부족한 나는 지기도 전에 정신승리를 잘하는 편이다. 시작도 전에 '질 수 있지만 괜찮다'고 생각해버리는 내가 이정효 감독을 만났다면 마음가짐부터 잘못되었다며 엉덩이부터 걷어차일 것 같다. 읽으면서 '돈 받으면 프로'라던 김성근 감독 멘트가 생각나기도 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이 그 사건 이후로 다큐가 되어버린 걸 보면 한 때 프로였던 사람들에게 정말 임팩트있는 메시지였던 것 같다.
평탄한 길이라면 애써 스스로를 낭떠러지로 몰아가야 한다
나보다도 한참 저 뒤에서 걸어오는 이들도 많은 것을 잘 알지만 나도 나름 밑바닥이나 다름없는 위치에서 시작했다. 경력이 부족하고 인지도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대학팀 코치, 대학팀 감독, 프로팀 코치로 10년 동안 경력을 쌓아 겨우 프로팀의 감독을 맡았으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항상 있었다. 내로라하는 축구인들에게 나는 감독 같지도 않은 감독, 한 때 '콘이나 놓던 놈'이었으니까.
정말 웃기는 점이 뭐냐면, 세상은 나처럼 이 악물고 올라온 사람을 환영하고 응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때가 되면 시원하게 추락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방심하거나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남들이 응원해준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나한테 패자부활전은 없다고, 더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고, 더욱 마음을 다잡는다.
흔히들 "사람은 위기에 몰렸을 때 본성이 나온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정말 싫어한다. 평소에 위기의식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태평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강등 위기에 직면하지 않아도 언제든 강등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긴장해야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러다 진짜 강등되니까. 지금 K리그2에 소속된 구단 중에는 한때 한국 축구를 호령하던 강호들도 상당히 있지 않은가.
내가 걷는 길이 조금이라도 평탄한 것 같다면 애써 스스로를 낭떠러지로 몰아가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은 더욱 그래야 한다. 스스로 낭떠러지 쪽으로 향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남들이 나를 그쪽으로 슬쩍슬쩍 떠밀 거다. 아예 내가 알아서 그쪽으로 걸어주는 편이 낫다. 은퇴할 때까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린 채로, 오늘이 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 밑줄 코멘트
세상이 자신 같은 사람을 응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추락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코리아컵 탈락으로 수원삼성 블루윙즈를 향한 언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정효 감독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자신의 말대로 세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낭떠러지를 걷고 있었다면 별 타격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
세미프로에 충격패…이정효의 수원, '코리아컵 조기 탈락'
'스타 사령탑' 이정효 감독이 이끄는 프로축구 K리그2(2부) 수원 삼성이 충격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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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하지 않는 것이 목표라면, 프로의 자리에 머물 자격은 없다
최악의 경우란 공을 허무하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선수가 실수를 피하려는 이유로 상상을 그만두는 것이다. 선수는 실수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플레이해서는 안 된다. 감독도, 스태프도 마찬가지이다. 프로로서 일을 하는데 실수하지 않으려고, 욕먹거나 혼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사람은 얼른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세상에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지상 과제인 직업도 많으니까. 거기에 축구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내가 선수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다. 과감하게 무언가를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빼앗긴다면? 그 즉시 영리하게 동시에 지저분하게 부딪쳐서 다시 공을 가져오면 된다. 2000년대 후반 그토록 강력했던 게겐프레싱 전술이 보여준 것처럼, 뺏긴 공을 다시 되찾아 올 때에 결정적인 공격 기회가 오고 그때야말로 어느 상황보다 골이 잘 들어간다. 빼앗기면, 다시 뺏어오면 그만이다. 그러니 빼앗기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수를 두려워하고 다음 플레이를 상상하지 않는 선수에겐 기회 같은 것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이 '상상의 무게'에서는 감독인 나도 벗어날 수 없다. 감독이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면 코치도, 선수도 덩달아 두려워하는 법이다. 나부터가 무참한 실패의 가능성이 빤히 보이는 와중에도 감히 무언가를 시도하려 들어야 한다. 감독에게 최악의 경기는 7대 0으로 지며 농락당하는 경기가 아니다. 최악은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기다. 뚜렷한 의도 없이 90분이 그저 흘러가는 경기. 감독이 이 한 번의 승부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는 '의도'가 눈에 보여야 한다.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경기를 구현할 수 있을지를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이 감독의 일이다. 나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버스 두 줄 세우고 수비만 하는 그런 축구도 어쨌든 의도가 있는 축구다. 개인적으로는 참 싫어하지만 최악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 밑줄 코멘트
흑백요리사에서 안성재 쉐프가 줄기차게 의도를 캐물었던 걸 보면 의도는 어디에서든 중요한 것 같다. 표현을 바꿔보자면 여기서 의도라는 건 목표이자 그 목표를 위한 전략이나 생각들까지도 포함할 수 있겠다. 아무리봐도 보이지 않았고 그 누구도 추측조차 할 수 없었던 홍명보 씨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가 이 책을 월드컵 전에 읽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탓할 것인가, 찾을 것인가 : 열악한 환경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열악하고 부실한 환경에 놓이는 사람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엔 환경 탓을 하며 종종 다른 곳과 비교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엔 환경처럼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은 제쳐두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당연히 후자다. 절실한 사람은 애초에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은 방법을 계속 찾는다. 수많은 방법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물론 끝내 방법이 나타나지 않는 비극도 일어나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집중해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성장을 이루게 된다.
💡 밑줄 코멘트
꽤 오래 삽질을 주된 업무로 둬서 '안되는 상황에서 방법을 찾는 일'에 꽤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요새 마음이 잘 안잡히는 걸 보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환경 탓이 아닌데도 시야가 좁아져 괜한 환경 탓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통제할 수 있는 변수에 집중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다보면 통제할 수 없어보이던 환경 자체가 바뀌는 날도 올 거라고 믿는다.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를 넘어 "나는 이렇게 해야지"로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거나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 구성원이 뜻대로 자기 뜻을 펼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경기장이나 인터뷰에서 나의 행실을 접하고는 나를 눈치 하나 안 보고 마음대로 살아온 사람으로 볼지도 모르겠는데, 알다시피 한국 축구판에서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선수로 십여 년간 뛰면서, 그리고 코치 생활을 오래 하면서 느낀 것은, 조용히 칼을 갈아야 하는 시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이 판단하기에 객관적으로 높은 실력이 될 때까지 역량을 키우고 그나마 주도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조금씩 뜻을 펼쳐가면서 나의 길을 '정립'하는 데 만족해야 할 때도 있다. 시키는 것만 하라고, 다른 것은 아예 쳐다도 보지 말라고 하는 때려죽이고 싶은 상사 밑이라면 당장 그만두고 나가야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쌓아가면서 버텨야 한다. 나의 기회가 올 때까지.
나는 프로 축구팀에서 7년을 코치로 있었다. 한국 축구가 누적해온 고루한 문화 속에서 코치인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 판이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 대학이든 프로든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변화를 주려고 하면 다시 하던 것으로, 심지어 20년 전에 내가 하던 것으로 돌아가도록 관성적인 지시가 내려졌다. 특히 대학 때는 복잡한 전술 훈련을 도입하고 싶어서 몇 가지 패턴의 훈련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제지당했다. 선수들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세상은 이렇게 바뀌었는데 새로운 세대의 선수들은 내가 선수 때 하던 그 축구를 그대로 하고 있었고 코치인 나는 변화를 시도할 수 없었다.
프로팀 코치를 3년 동안 하면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내가 감독이 되면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3년간 주변을 보니 저렇게 하지 말자던 사람의 대부분이 나중에는 결국 저렇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4년 차부터는 그 생각마저 고쳐먹었다. 내가 감독이 되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해야지, 라고. 그것은 큰 차이였다. 불만만 가진 사람은 나중에 선수에게 똑같은 불만을 안기는 지도자가 된다. 불만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방안까지 강구하는 사람이 나중에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 최초가 된다.
💡 밑줄 코멘트
앞서 나왔던 의도는 여기서도 이어질 수 있겠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살기 위해선 1차원적인 생각에 그쳐서는 안될 것 같다. 불만부터 구체적으로 표현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고민도 구체적으로, 그 대안도 구체적으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에필로그 - 위로를 넘어, 나만의 정답을 치열하게 벼려내는 시간
당장 내 앞의 일상부터 돌아보게 된다. 과연 나만의 명확한 '의도'를 뾰족하게 세우며 조용히 칼을 가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나. 이 치열한 과정이 결국 이정효 감독이 말하는 진정한 프로의 태도일 것이다.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무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매일 부딪히고 깨져야 하는 내 밥벌이 현장에서 역시 정답은 언제나 스스로 집요하게 만들어가는 자의 몫이다. 답이 없는 세상 속에서 오늘도 내 방식대로 끈질기게 나만의 정답을 찾아내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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